포스테키안

2018 봄호 / 문화 거리를 걷다 / 두 세계의 경계를 걷기

2018-04-19 50

두 세계의 경계를 걷기

 

어릴 적 나는 활자에 푹 빠져 살았다. 매일 이런저런 생각으로 공책을 빼곡히 채웠고, 수업시간에 몰래 책을 읽다 선생님에게 압수당하던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갑자기 분자의 세계에 반해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글쓰기를 향한 동경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바쁘게 보내던 지난 9월이었다. 실험은 매일 망하고 졸업은 불투명하던 어느 저녁, 나는 갑작스러운 연락을 하나 받았다. 그해 여름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했던 소설이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기사가 뜨기 전까지 친구들에게만 살짝 소식을 전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괜한 의문을 품으며(‘내 소설이 두 편이나 당선되다니, 혹시 뭔가 크게 잘못된 게 아닐까?’) 여전히 재현되지 않는 실험과 나노입자 탐침 합성을 생각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후로 몇 번의 인터뷰를 하고, 또 다음 원고와 강연을 부탁받고 나서야 비로소 무언가 삶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실감했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를 하러 가면 늘 “이공계 대학에 다니면서 어떻게 소설을 쓸 생각을 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소설을 썼던 과학자들도 많았다고 답하려 하지만 어쩐지 탐탁지 않다. 아직은 문학과 과학이 구분된 다른 영역에 속한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내가 이공계 대학에 잘못 들어온 별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소설 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학부 졸업학년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곰곰이 돌이켜 본 다음에야 새삼 알았다.

학교에 입학한 첫해에는 인문사회학부 여름방학 특강으로 시 창작 수업이 열렸고, 그다음 해는 소설 창작 수업이 열렸다. 과학기술 문화콘텐츠 공모전을 준비하며 생전 처음으로 SF 단편을 완성했고, 대중문학의 이해 강의에서는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던 SF의 세계를 제대로 접했다. 친구의 친구들을 모아 어설프게 진행했던 교내 글쓰기 모임, 짧은 글 한 편을 위해 책 10권을 읽어야 했던 교지편집위원회 활동들도 떠오른다. 그 경험들이 없었더라면, 과학소설을 쓰는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책을 출간하기 직전 마지막 교정을 볼 때 작가 소개 글에 출신학교를 넣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나는 내가 다녔던 이 학교를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작가로서의 활동에 굳이 모교 이름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편집자님께 보낸 초안에는 학교 이름이 빠져 있었다. 여러 이유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최종안에는 들어갔는데, 지금의 나를 이루는 많은 부분들이 여기에서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이 기고문을 시작할 때 나는 ‘그러니까 독자 여러분도 글쓰기를 같이 하자’는 식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꼭 글쓰기가 아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하는 일이 무엇이든 괜찮다. 여러분도 여기서 그곳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아마 그 길은 처음의 예상과는 많이 다를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그 예상치 못한 길을 걷는 과정이 참 즐거웠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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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 | 화학과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