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

2018 봄호 / 세상 찾기Ⅱ / 말 잘하는 과학자

2018-04-19 62

말 잘하는 과학자

 

꽉 찬 학부 커리큘럼 끝에 펼쳐진 나만의 연구가 마냥 즐겁고 두근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업무 시간에 논문을 읽기도, 실험실에 들어가기도 싫을 때면 몰래 TED 강연을 한 편씩 보는 습관이 생겼다. 일반인이 자신의 주제를 정갈하게 정리하여 수많은 관중 앞에서 펼치는 약 10여 분간의 발표. 무대 위에서도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자신만의 생각을 전하는 연사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매력적이길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까? 특히나 많은 대학원생은 자신의 연구를 매력적인 글솜씨와 발표 실력으로 선보이는 순간을 꿈꾼다. 대학원에 진학해 의공학을 연구하는 나는 내 연구의 의미를 듬뿍 담은, 매력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비단 논문의 대호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글이 멀리 퍼져 몰랐던 분야의 전문가의 시선에 닿은 후 수많은 도움의 손길로 돌아오도록, 어려운 어휘로 서술된 논문 필체 말고도 보다 많은 독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필력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원 입학 직전, 친구의 권유 덕분에 아시아태평양물리이론센터(APCTP)에서 주관하는 APCTP 과학커뮤니케이션 스쿨에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이번 기수로 17회를 맞은 APCTP 커뮤니케이션 스쿨은 과학 지식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양성을 위해 운영되는 과학문화사업으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전국 대학생 모두가 지원할 수 있다. 사흘의 기간에 걸쳐 모두 한 편씩의 글과 프레젠테이션을 완성하는 본 캠프는 내가 처음으로 나의 글과 대면하는 결투장이었다. 수식을 통한 직관적 표현이 많은 이공계 학문의 특징과 함께 묵직한 양의 학업이 함께하는 캠퍼스에서 지내다 보면 좀처럼 깊은 대화를 나눌 일이 많지 않아 스스로 언어 실력이 감퇴하는 걸 많이 자각해 왔다. 이번 캠프는 ‘CRISPR 유전자 가위’를 주제로 전문가를 모셔와 강연과 대화를 통해 전문가의 시각으로 바라본 과학 기술에 대해 들어보았고, 뒤이어 본교 인문사회학부 교수님들께서는 논리적 글쓰기와 효과적 발표에 대한 강의를 통해 최종 과제에 큰 도움을 주셨다. 그 결과 사흘 동안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어 에세이 한 편과 팀 발표를 완성했고 마지막 날 값진 결과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글쓰기는 첨삭이 불가능하고 사족을 모두 드러내 핵심만을 다뤄야 하기 때문에 나의 경우 발표보다 글쓰기의 어려움이 더욱 컸다. 캠프 중 글쓰기 강의의 내용을 일부 요약하자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재료가 될 색다른, 탁월한 시선이 필요하다. 이때에 크게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선 잠시 과학의 색안경을 내려놓고 세상의 비논리성을 인정해야 한다. 강양구 과학부 기자님께서는 첫 강의에서 기술의 성장이 사회적 환경과 경영, 사회문화적 변화 등 외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사례를 언급하셨다. DDT와 비닐봉지, 냉장고, 콘돔 등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물건들이 그 예였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과학기술의 효율성만으론 결코 설명될 수 없는 모순이 가득하다. 과학 기술 성장을 향한 맹목적인 기대를 과감히 내려놓아야만 더욱 객관적인 시각에서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재평가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의사소통이 곧 튼튼한 아이디어를 위한 레시피라는 것이다. 충분한 논리력으로 신빙성 있는 아이디어를 캐내기 위해서는 전문적 지식을 갖추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나의 전공 테두리 안에서만 모든 잠재력을 판단하려 하면 좁아진 시야로 좀처럼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기가 어렵다. 이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 사이 적극적인 소통은 예상하지 못한 아이디어의 구멍에 타당성을 채워 넣는 데 도움을 준다. 약학과, 물리학과, 기계공학과 학생으로 구성되었던 우리 팀은 헤모글로빈과 엽록소 사이의 분자 구조적 유사성에서 착안하여 광합성이 가능한 인간을 상상해 보았다. 다소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었으나 서로의 전공지식을 쌓아가며 구체적인 생체 체계와 그로 인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포함한 세심한 세계관을 설계했다.

아이디어가 잘 준비되었다면 다음 단계는 명료한 서술을 통해 가감 없이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흘간의 캠프 동안 문체에서 구차한 설명을 과감히 탈락시켜 명료한 글을 빚어내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이전엔 손쉬운 용어로 찬찬히 풀어쓴 친절한 글이 우수한 글이라 여겼다. 쌀을 갈아 이유식을 만들 듯 어려운 개념을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소 개념들로 쪼갠 단어를 나열하며 설명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단어를 끌어쓰다 보니 논리는 긴 설명 속에 흐려지기 쉬웠다. 대뜸 백승권 작가님께 한 번 크게 혼난 덕분에 장황함을 탈피하고 담백한 문체로 돌아왔다. 독자의 입장이란 대단히 게을러 과하게 추상적이고 개념의 열거뿐인 글을 쓰면 안된다. 다소 딱딱할 수 있더라도 사실 전달 및 설득에 힘을 더하기 위해선 논리의 뼈대를 과감히 드러내도 좋다.

나는 배우는 게 즐겁다. 군더더기 없는 글과 발표는 독자와 청중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하고 이는 곧 배움의 즐거움이다. 즐거움을 흩뿌리는 연사를 바라볼 때면 지식 그 이상의 전율 비슷한 것이 나의 관념을 흔들어 놓을 때가 많다. 대학원에 진학해 새로운 지식을 탐험하는 지금 돌이켜 보면, 사흘에 걸친 캠프는 딱딱해진 고정관념에 유연성을 더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참가군이 이공학도들에 국한되고 개최 기구인 APCTP 소개 일정까지 포함해 다소 일정이 바쁘게 진행되었다는 점은 약간 아쉬웠다. 그럼에도 뜨거웠던 참가자 19인의 열정적인 참여 덕분에 참신하고 알찬 발표와 글로써 캠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신지식의 개척은 사실 이미 알려진 분야간의 융합으로부터 도래한다. 학생 여러분을 고리타분한 문제와 계산 너머에 왕성한 의사소통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포항공과대학교 캠퍼스에서 마주하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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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현 | 창의IT융합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 1년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