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즐기는 서퍼
글|기초과학연구소 이형우 박사후연구원 (물리 동문, 2025년 박사학위 취득) & 포스텍 대외협력팀
Editor’s Note
대외협력팀에 근무하며 수많은 연구 현장 사진을 접하곤 합니다. 그중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정밀한 광학 실험 속에서도 위트와 생동감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들. 이렇게 매력적인 기록을 남긴 연구자가 궁금했던 것이 이번 인터뷰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진 너머, 연구를 하나의 즐거운 탐험으로 만들어가는 이형우 연구원을 만났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오히려 평생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처럼 다가왔습니다."
최근 엑시톤(Exciton) 확산 증폭 현상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며 '네이처 머티리얼즈(Nature Materials)'에 이름을 올린 이형우 연구원에게 물리학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즐겁게 항해하는 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physicsurf': 정해진 길 대신 새로운 물길을 찾아
Q. 메일 아이디 ‘physicsurf’가 인상적입니다. 언제부터 물리학을 공부해야겠다는 확신을 가지셨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매번 새로운 등굣길을 개척해보겠다며 뒷산으로도 가고 논길로도 가다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학교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대항해시대’라는,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탐험하는 게임에 푹 빠져 성적이 바닥을 맴돌았습니다. 그러다 처음으로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조리과학고등학교에 지원했는데, 성적이 너무 낮아 떨어졌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생겼을 때 그 길로 가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말입니다.
그 이후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UNIST에 입학했습니다. POSTECH처럼 입학 후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보니 여러 분야를 폭넓게 접할 수 있었는데, 그중 물리학에 가장 강하게 끌렸습니다. 이 학문이 마치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넓이가 막막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오히려 “평생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때부터 물리학을 계속 공부해보고 싶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Q. 최근 발표하신 연구 성과들이 ‘AI 전력난을 해결할 게임체인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연구 내용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현재 반도체는 전자의 흐름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전자가 이동할수록 필연적으로 열이 발생하고, 이는 AI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손실과 성능 저하로 이어집니다. 제가 연구하는 ‘엑시톤(exciton)’은 반도체 내부에서 빛과 전자의 성질이 결합된 입자로, 전기적으로 중성이기 때문에 이동 과정에서 열 발생이 거의 없어 차세대 초저전력 정보 전달의 핵심 열쇠로 꼽힙니다.
저는 지난 7년 동안 ‘탐침증강 현미경’을 활용해 이 엑시톤을 나노미터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제어하고 그 거동을 관측하는 연구를 이어왔습니다. 결국 저의 연구는 나노 세계에서 빛과 입자를 정밀하게 다루어, 기존 반도체 기술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초물리 연구가 단순히 이론에 머물지 않고, 저전력 AI 반도체나 신개념 광소자 같은 실제 산업기술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포항이기에, POSTECH이기에 가능한 삶
Q. 최근 ‘동아사이언스’와의 인터뷰를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기사 링크) 일종의 ‘방랑가’ 기질이 느껴졌는데요. 좁고 정적인 도시처럼 느껴질 수 있는 ‘포항’에서 그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분출하며 대학원 생활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지금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입니다. 물리학자답게 비유하자면, 인생의 시간 축을 x축으로 두고 행복의 양을 y축으로 둔다면, 결국 가장 행복하게 산 사람은 그 면적, 즉 ‘행복의 적분값’이 가장 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생의 각 시기마다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제각각입니다. 젊을 때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고,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행복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중에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을 희생하자”는 방식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야 인생 전체를 적분했을 때 총 행복량이 가장 커질 수 있으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포항에서의 삶 역시 미래를 위해 잠시 견뎌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여유를 발견해가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포항은 사람이 붐비지 않는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동해 바다를 즐길 수 있는 굉장히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또 바닷가 가까이에서 캠핑을 즐길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말이면 서핑이나 스노쿨링을 하고, 바닷가에서 캠핑하며 바비큐를 해 먹기도 하면서 포항에서만 가능한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포항은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도시입니다.

서핑과 스노쿨링을 즐기는 모습
저에게 포항의 바다는 생각을 환기해주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긴 호흡의 연구를 하다 보면 머릿속에 생각이 계속 쌓이고, 때로는 그 생각의 축적이 오히려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틈을 막기도 합니다. 그럴 때 바다 위에 떠서 저 멀리 태평양에서 이어져 온 파도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더 큰 스케일의 세계를 상상하게 됩니다. 또 때로는 정신없이 파도를 맞으며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머릿속에 쌓여 있던 생각들이 조금씩 비워지고 새로운 관점이 들어올 자리가 생깁니다.
결국 물리학도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 아니겠습니까? 포항의 바다는 제게 연구자의 감각과 상상력을 다시 열어주는 공간이었습니다.
Q. 포스텍에서 공부하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지도교수님이신 박경덕 교수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학위 과정 동안 교수님께서는 저에게 정말 큰 믿음을 보내주셨습니다. 평일에 파도가 좋으면 서핑을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려도 응원해주셨고, 새롭게 해보고 싶은 연구 아이디어를 말씀드릴 때도 늘 긍정적으로 들어주시며 묵묵히 지원해주셨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교수님 입장에서는 다듬어지지 않았거나 현실성이 부족해 보이는 아이디어도 많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교수님께서는 바로 정답을 알려주시기보다, 제가 직접 부딪히고 시도하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연구란 단순히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실패를 견디며 자기만의 방향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태도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갖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믿어주는 것처럼, 지도교수가 학생을 믿어준다는 것 역시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지켜주신 저의 창의성과 자율성은 지금의 제가 연구자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026년 4월 보도된 박경덕 교수 연구팀 연구성과 사진 자료. 2차원 반도체의 ‘엑시톤(exciton)’ 이동을 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간에서 정밀하게 제어하고, 이를 기존 대비 최대 8,300%까지 증폭시키는 새로운 물리 현상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였다. 이 성과는 국제학술지 'Nature Materials (네이처 머티리얼즈)'에 현지 기준 지난 3월 31일 게재됐다.
Q. 사진 공모전에 매번 기발한 사진을 출품하시는 모습에서 ‘연구실은 진지하기만 한 곳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본인에게 이런 유머는 치열한 연구실 생활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나요? 실제 연구 성과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도 궁금합니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특히 물리학처럼 긴 호흡의 탐구가 필요한 분야에서는, 연구를 즐기는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험이 항상 예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문제 앞에서 버텨야 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연구실에서도 여러 상상을 즐기며 실험에 임하곤 합니다. 최근에는 아르테미스 2호 관련 뉴스를 본 뒤, 우주비행사가 우주선을 타고 미지의 우주를 탐사하듯이 저도 나노 세계를 탐험하는 ‘나노비행사’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 레이저를 정렬할 때는 마치 스나이퍼가 된 것처럼 집중해서 조정하기도 하고, 파티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조금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반복적이고 치열한 실험 과정을 계속 즐겁게 이어가게 해주는 저만의 방식이자 의식입니다.


2024년 대학 사진 공모전 출품작
유머나 상상력은 단순히 분위기를 가볍게 만드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구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생각을 너무 한 방향으로만 밀어붙이면 오히려 시야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잠시 관점을 바꾸거나, 실험을 조금 다른 이미지로 바라보면 뜻밖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실험 결과 해석이 잘 되지 않을 때 서핑을 하러 가서 바다 한가운데에서 생각을 정리한 적도 많습니다. 장소가 어디든 계속 연구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여유와 전환이 오히려 문제를 새롭게 보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주비행사가 로켓에 탑승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때 느끼는 두근거림과, 우리가 연구실에서 실험을 할 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물리 현상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설렘과 상상력을 잃지 않는 것이, 긴 연구 과정에서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자신만의 파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Q. ‘physicsurf’라는 아이디에서 착안해서, 자신만의 파도를 기다리고, 기꺼이 그 파도에 몸을 던지는 용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80만원으로 떠난 세계 일주와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물리학자로의 창의성에 기여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실을 다지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요. 대학과 연구실 밖을 두려워하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잠시 벗어나도 괜찮다’는 유쾌한 응원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휴학을 하고 약 2년 동안 떠난 세계여행이었습니다. 여행 초반에는 끊임없이 들어오는 새로운 경험과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물리학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흔들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생 여행하면서 살아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여행도 하나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늘 다음에 묵을 숙소를 걱정하고,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다니고, 짧고 강렬한 자극이 반복되는 삶이 저에게는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는 반복과 실패, 인내의 시간을 견딘 끝에 얻는 성취감에 더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겪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 가져보지 못한 삶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하다면 직접 해보는 것입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면 그 길이 계속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면 그것이 정말 나에게 맞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POSTECH에 입학한 학생들이라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지금 가고 있는 길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을 더 두렵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벗어난 길이 지름길일 수도 있고, 내가 정말 가야 할 새로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갔다가 아닌 것 같으면 돌아와도 됩니다. 적어도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막연한 후회나 미련은 털어낼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렇게 돌아온 뒤에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해 더 큰 확신을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쯤은 자신이 궁금해하던 길로 나가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서핑보드에 붙어있는 노벨상 메달 스티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