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
2022 봄호 / POSTECH ESSAY
포스텍 교수님 이야기
양자 물리학에 빠지다
진로에 대한 고민
고등학생들을 위한 글을 쓰는 이 소중한 기회를 연구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소개하는 데보다는 물리학 연구자로 성장하면서 고민했던 것들을 공유하는 데 쓰고 싶다. 돌이켜보면 20년 전 고등학생 때 이런 고민을 했었다. ‘간단한 수식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물리학 공부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건 그거고, 그런 흥미 혹은 동경만으로 물리학과로 진학해도 되는 걸까? 물리 경시대회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모두 천재 같아 보이고 성적도 최상급인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물리학 전공을 할 수 있을까? 입학한다 쳐도 그런 쟁쟁한 동기들과 경쟁해서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을까?’ 소수정예 교육, 전원 기숙 생활로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등의 이점을 가진 포스텍으로 진학하겠다는 것은 수월하게 정했었지만, 학과 선택에서는 고민이 많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물리학과 교수로서 1학년 무은재학부생들과 진로 상담을 해보면 학생들이 고등학생 시절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더욱 학생들의 고민이 공감되고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당시 나는 경시대회 성적이 잘 나오던 화학과로 진학했다. 고민은 복잡했지만, 결정 이유는 간단했다. 성적이 잘 나오는 과목에 흥미와 자신감이 더 붙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화학과 학부에서는 양자 역학으로 시작하여, 원자가 합쳐진 분자에 대해, 그 분자들 간의 반응에 대해, 또 분자의 집합체인 고분자에 대해, 더 나아가 생물체를 이루는 생고분자까지 배웠는데, 다루는 대상의 범위가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아주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물질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항상 남아 있었고,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어떤 대상이든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답은 물질을 이루는 원자를 속속들이 이해해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게 물리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해서, 넓고 깊이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넓이와 깊이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는 개인의 ‘취향’인 것인데, 이런 취향 혹은 성향이 학과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 같다. 의외로 어려운 단계는 본인의 취향을 아는 것이다. 특히 입시 중심의 교육 환경에서는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 같다. 나도 그랬고, 학부 중반에 들어서서야 물리학에 관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잠깐 학교 홍보를 하자면, 포스텍의 무은재학부 제도를 이런 진로 탐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갖는 데 활용할 수 있으면 한다.
양자 소자라는 연구 분야
자연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여러 과목 중 단연 양자 역학이 그 욕구를 잘 충족시켜주었다. 근본 원리로 파고들면 들수록 일상생활에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를 들면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죽어 있는 상태인 양자 중첩 상태가 가능하다든지, 입자가 벽을 뚫고 지나가는 양자 터널링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것들을 배웠다. 수업 시간에 배운 대로 착실히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면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지만, 이런 직관에 반하는 양자 현상들이 정말로 일어나는 것인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쯤 잊고 있었던 나의 ‘로망’이 기억났다. 지금은 훨씬 유명해졌지만, 고등학생 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양자 컴퓨터’란 아이디어다. 양자 역학이라는 최신 물리학 개념을 이용한 양자 컴퓨터는 기존 컴퓨터보다 지수적Exponentially으로 빠를 수 있다는 글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흥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이야말로 현 인류의 순수 학문과 응용 학문 결합의 결정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직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마침 물리학과 이후종 교수님께서 초전도 기반 양자 컴퓨터의 가장 기본 단위인 조셉슨 접합Josephson Junction에 관해세계적인 연구를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연구 참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도 초전도 양자 소자의 양자 전도 실험 연구를 하고 있다. 이쪽 연구의 길로 들어선 큰 동기는 양자 컴퓨터였으나, 지금은 ‘양자 역학에 기반을 둔 소자Device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유용한 장치를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양자역학적 성질을 내포하고 있는 물질인 양자 물질을 사용하여 소자를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원자층 하나의 두께의 흑연을 그래핀Graphene이라고 하는데, 이 물질 안에 돌아다니는 전자는 마치 질량이 없는 상대론적 양자 입자처럼 행동하며 디랙 방정식Dirac Equation을 따른다. 이를 이용하면 입자를 빛의 속도 근처로 가속해야만 나타나는 입자 물리 영역의 상대론적 양자 역학을, 그래핀의 전류와 전압을 측정함으로써 비교적 손쉽게 연구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고체 물질의 장점은 유용한 나노 소자로 만들어 응용하는 연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래핀에 초전도체를 붙인 나노 소자를 이용해 아주 민감한 마이크로파 센서나 적외선 센서를 구현했는데, 그래핀의 특이한 전자 성질을 이용하여 가능했다. 그래핀뿐만 아니라 수학의 위상이라는 개념이 물질의 전자 구조에 적용된 위상물질Topological Material 같은 아주 흥미로운 물질도 있으나, 너무 어려운 개념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도록 하겠다.
연구자의 길
물리학 연구를 하기 위해 복수전공을 하기로 하고 학부 시절에 연구 참여도 활발히 했기에 대학원을 진학하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박사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내 두 눈으로 양자 현상을 직접 보리라는 동기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학원 시절을 보냈고 나름 논문도 많이 쓰며 다양한 연구 경험도 갖추었다. 하지만, 대학원 졸업이 다가올 때쯤 진로 고민이 생겼다. 6년 반 동안의 대학원 생활을 돌이켜보면 연구란 것이 열심히만 한다고 그 노력에 정비례하는 보상이 따라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연구를 직업으로 선택한다면 노력에 대한 보상이 언제나 보장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 먹고 살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라는 생각에 박사 후 연구원Ph.D의 길을 걸었다. 역시나 쉽지 않은 해외에서의 연구자 생활이었지만, 나 스스로 선택한 길인 만큼 후회는 없었다. 선택의 기로에 선 학생들에게 조언을 감히 하자면, 후회 없는 좋은 선택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지금은 비슷한 열정을 가진 연구실원들과 함께 연구실을 꾸려나가고 있다.
꼭 대학교수가 아니라도 대학 연구소, 국책 연구소, 기업 연구소 등 연구를 직업으로 지낼 수 있는 연구자의 길은 아주 많으며 또 각자의 역할이 있다. 또, 꼭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며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길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떤 진로를 택하든, 여러분의 순수한 열정과 동경이 남들의 고정 관념에 의해 쉽게 좌절되거나 무시되지 않았으면 한다. 힘들고 어려운 지점이 조금씩 달라서 그렇지 어차피 모든 직업은 비슷한 정도로 힘든 것 같다. 어떤 진로를 택해도 비슷하게 힘들 거라면 기왕이면 본인의 순수한 열정이 조금이나마 보전될 수 있는 그런 의미 있는 삶을 택해 살길 바란다. 그래야 좀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6월 17일, 에세이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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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포스텍 물리학과 이길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