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
2023 179호 / POSTECH ESSAY
천둥‘벌거숭이’를 이끌던 20대의 젊은 우리 ‘골목대장’
안녕하세요, 포스테키안 독자 여러분. 이 글은 1997년 저의 고등학교 담임선생님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사실 선생님과 연락이 닿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저에게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미래 포스텍에서 과학자를 꿈꾸는 여러분이 이러한 소양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합니다.
이보경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박사학위를 하던 중에 페이스북을 통해서 메시지를 한번 드린 이후로 어느덧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어느덧 제 나이가 첫 담임으로 저희 반을 맡으셨을 때의 선생님 나이보다 무려 15살이나 많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뵙지 못한 지난 긴 시간 동안 제 주위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곤 했는데, 이번 편지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전달될 것 같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는 공개적인 통로를 통한 전달이겠지만, 선생님을 향한 저의 마음이 선생님께 닿길 원합니다.
어디서부터 저의 이야기를 전해야 긴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어제 뵈었던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최근 일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영국과 미국에서의 긴 유학 생활을 마치고, 2년 전부터 포항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포항은 사실 면접을 보러 오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직접 살아보니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핑계로 이렇게 아름다운 곳만 찾아다닐 수 있다는 것또한 참으로 즐거운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포항에서 합성생물학이라는 분야를 연구하며, 학생들에게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정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21년의 봄부터 저는 자연스레 1997년의 봄, 모교로 돌아온 두 번째 해에 첫 담임을 맡아 천둥‘벌거숭이’를 이끌던 20대의 젊은 우리 ‘골목대장’을 추억합니다.
(좌)고등학교 연극반 시절 (우)학부시절
우리의 골목대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대학 입학’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시행되던 숨 막히는 교육 현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하며, 시를 읽을 수 있는 쉼터와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을 빠지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만큼, 모둠일기를 통해 자기 생각을 글로 나타내고, 이를 읽으며 각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작은 공동체를 확립하는 것도 중요한 일임을 배우게 했습니다. 골목대장은 직접 우리들의 삐삐에 음성 메시지를 남겨 우리를 눈물짓게 했고, 교실 뒤편 게시판에 월간 ‘좋은 생각’의 한 페이지를 매일 같이 갈아 끼워 우리에게 긍정적 사고의 힘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 모둠 일기에 직접 손으로 ‘댓글’을 적어주어 우리가 살아가며 평생 잊지 못할 응원을, 추억을,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를 간직할 소중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골목대장이 가르쳐 주었던 이러한 ‘인간적’ 혹은 ‘문학적’ 요소는 일반적으로 냉철한 논리와 건조한 분석 능력을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과학적 사고에 다소 불필요한 능력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러한 능력은 연구를 진행하며 맞닥뜨리는 많은 과학적 문제를 보다 일상적이며 쉬운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큰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각적 해석 능력은 복잡한 수치와 기호, 그리고 그래프로 얻어지는 과학적 데이터를 새로운 방식으로 분석하는 능력의 근간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보다 창의적인 시스템을 구현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는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실험과 실험자인 나를 철저히 분리해 실험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대신 이를 지혜롭게 받아들이며 실패한 데이터 안에서 새로운 해석을 도출하는 중요한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시절
처음으로 ‘나의 수업’을, 그리고 ‘우리 연구실’을 갖게 된 40대의 저는 약 25년 전 첫 담임선생님을 맡은 20대의 골목대장의 모습에 저를 비춰봅니다. 정채봉 시인의 ‘첫 마음’이라는 시 속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이라는 구절처럼 여전히 학생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설레고 기쁩니다. 하지만 식을 줄 몰랐던 선생님의 애정과 열정에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저의 모습에 자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약간의 수고를 들이면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쉽게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실수투성이였으면서도 오만했던 날 것의 제 모습을 그대로 기억하고 계실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는 그나마 본인이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기에 과거의 부끄러움을 견디며 오늘을 살 수 있다고 했지만, 저는 아직 그 정도의 내공을 갖추지 못했다고 자신합니다. 제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쓴 편지가 선생님께 실제로 닿을지 모르겠지만, 만일 이 글을 선생님께서 읽으신다면 마치 이곳 포항 앞바다에 던져 놓은 빈 포도주병의 편지가 선생님께 도달한 것만큼 즐겁고 반가운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래 걸려도 괜찮습니다. 오늘 적은 이 생각들은 이미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이니 오늘이나 혹은 몇 해 뒤라도 새로울 것이 없어 언제라도 선생님께 전해지기만 한다면 기쁠 뿐입니다. 행여 전해지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포스텍 진학을 꿈꾸는 많은 예비 대학생들이 제가 선생님께 적은 사사로운 편지를 읽고 과학자로서 필요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면 그로서도 충분할 것입니다.
뵙고 싶습니다. 다시 만나 뵙게 될 때까지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준구 올림
벌거숭이 : 의정부고등학교 연극반 이름
골목대장 : 지금은 사라진 극단 벌거숭이 홈페이지의 이보경 선생님 닉네임
관련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_uLB9kmWQI
(글) 포스텍 화학공학과 이준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