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

2023 180호 / POSTECH ESSAY

2023-12-12 477

감동을 주는 꿈을 가진 미래의 연구자를 기다리며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은 동료를 대상으로 논문을 쓰는 연구자에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고민 끝에 포스테키안의 독자들에게 제 인생을 바꾼 꿈이라는 주제로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이 글이 누군가의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면서요.

흔히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고 하듯 꿈도 성장하면서 바뀌게 됩니다. 저에게도 제발 어느 대학에서라도 나를 받아줬으면 하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체 게바라처럼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이제 중견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제 경우처럼 꿈이 자꾸 바뀌고, 지속적이지 않다면 도대체 꿈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조금 더 지속 가능한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삼십 대 중반이었습니다. 한 학회에서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는 NASA 프로젝트 책임자의 초청 강연을 들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탐사선을 풍선에 싸서 던졌는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무거운 탐사선을 견딜 수 있는 풍선을 쓰려면 풍선이 더 무거워져서 연료를 더 써야 하고 그래서 더 큰 비용이 들게 되는 난감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대한 강연이었습니다. NASA의 연구자는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항공모함에 짐을 내리는 장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탐사선을 둘로 나눠서 하나는 역추진해서 탐사선이 화성에 부딪히는 속도를 줄인 다음 분리하고, 최종적으로는 훨씬 가벼워진 착륙선만 착지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습니다. 화성 탐사선 프로젝트는 풍선에 싸서 던져졌던 PathFinder(1997년)에서 시작해서 방금 소개한 Curiosity(2012년), Perseverance(2021년)으로 이어지는데요. 무려 25년에 걸쳐 계속된 도전의 길을 보면 존경하는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튜브로 탐사선의 화성 착륙 장면을 찾아보시면 백발이 성성한 과학자들이 맘껏 기뻐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길잡이, 호기심, 인내라는 탐사선의 이름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평생을 바친 과학자들의 인생을 대변해 줍니다. 이처럼 하나의 목표에 인생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연구자들의 꿈과 로망입니다.

 

그 강연을 들은 날부터 며칠간 나도 저런 연구를 하고 싶다는 열망과 부러움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나도 로켓 과학자를 꿈꿀 수 있는 좀 더 잘사는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누가 나에게 저런 연구를 할 방법을 미리 알려줬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왜 나는 인류가 가진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최전선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도체를 연구하게 되었을까 하는 원망도 했습니다. 한참을 그러다가 나름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내가 잘 아는 반도체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찾아보자. 그래서 데이터센터가 에너지를 덜 쓰도록 해서 환경에도 도움이 되고, 누구나 차별 없이 정보화 사회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세상에 기여해 보자’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꿈은 어렸을 때처럼 세상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화려한 꿈도 아니고, 많은 돈을 벌거나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꿈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가는 길이 조금 더 의미 있는 길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내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지 않더라도, 누군가 가야 할 길 위에 조약돌 하나를 보태는 의미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꿈입니다. 그렇지만 이 꿈은 포기할 수도 없고 이 길을 가야만 가슴 떨리는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는 그런 첫사랑과 같은 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공이 보장된 기업을 떠나 학교로 왔고, 이런저런 시도 끝에 많은 사람에게 잊힌 삼진 로직 컴퓨팅이나 전압에 따라 기능이 변화되는 자기 재구성 회로 기술과 같이 남들이 도전하지 않는 신기한 기술들에 도전해 보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많은 국민이 노력한 결과로 우리나라는 이런 황당한 도전을 지원하고 격려해 줄 수 있는 멋진 나라가 되어서 목표한 연구를 맘껏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시는 분들이 많지는 않지만, 포스텍에는 이미 150 mm, 200 mm 웨이퍼에 이런 새로운 소자를 이용한 반도체 칩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2025년에 세 번째 반도체 연구시설이 완공되면 포스텍은 국내 1위, 세계 4위 규모의 반도체 연구시설을 갖춘 학교가 됩니다. 대단하죠?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반도체 기술을 맘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건데요. 이 시설은 우리나라의 모든 연구자가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습니다.

다시 처음에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가지는 꿈은 지속 가능하지 않고, 연구자의 길을 가면서도 바뀔 수 있는데, 그런 꿈은 필요할까요?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저는 논문을 몇 편 쓰겠다거나, 장래에 교수나 의사가 되겠다거나 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지나가서 일종의 지도가 있는 길을 가겠다는 것은 희망으로,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고 그걸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일 의지가 있을 경우를 꿈으로 구분합니다.

이렇게 꿈의 범위를 좁히고 나면 독자들께서는 스스로 질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꿈인가 희망인가? 모든 사람이 영화와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꿈을 갖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꿈을 꾸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연구자의 길은 너무 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꿈꾸는 사람들이 갖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저는 남들이 해봐야 안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일들을 여러 가지 해봤습니다. KAIST에서 처음으로 신문사를 만들고 초대 편집장으로 활동했던 일(지금은 KAIST Times로 이름이 바뀌어 5백 회 이상 발간되었습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고유전 절연막을 초창기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 사람들이 쓰게 될 때까지 전 과정의 연구에 참여하고 IBM과 SEMATECH에서 상용화 개발팀을 이끌었던 일 등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저를 불가능해 보이는 새로운 꿈에 도전할 수 있는 연구자로 만들었습니다. 작은 꿈을 꾸고 이루어 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꿈을 꾸지 않는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한 번, 두 번 일상의 압력에 굴복하고 나면 다시 꿈을 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속 가능하지 않더라도, 거창하지 않더라도, 꿈을 꾸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실 것을 추천합니다. Caltech의 교수를 뽑을 때는 3단계의 심사 과정에서 모두 만장일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연구에 대한 꿈이 감동을 주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누군가는 훗날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꿈을 가진 연구자가 되려는 포부를 가지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꿈꾸는 학교, 꿈 크는 학교, 포스텍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글)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이병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