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간계 배터리 '무질서'를 성능으로 바꾸는 설계법 제시]
낡을수록 힘이 세지는 배터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마치 세월이 흐를수록 깊은 맛을 내는 와인처럼, 충전과 방전을 거듭할수록 오히려 쓸 수 있는 용량이 늘어나는 배터리 소재의 비밀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POSTECH 배터리공학과 홍지현 교수, 배터리공학과 임국현 박사, 배터리공학과·신소재공학과 박규영 교수, 신소재공학과 통합과정 이호준 씨 연구팀이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 소재로 주목받는 망간계 양극 소재의 수명 단축 원인을 밝혀내고, 오히려 약점을 성능으로 바꾸는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 이번 연구는 현지 기준으로 지난 22일 에너지 분야 국제 학술지인 ‘에너지 & 환경과학(Energy & Environmental Science)’ 앞속표지 논문(inside front cover)으로 게재됐으며, 저널 내에서도 파급력을 인정받아 편집진이 선정한 게재 상위 10%(Hot article)로 평가받았다.
전기차 시장은 지금 값싼 중국산 LFP(리튬인산철) 배터리에 맞설 '가성비 좋은 차세대 소재'를 애타게 찾고 있다. 유력한 후보가 바로 ‘리튬과잉층상구조소재(이하 LMRO)1)’다. 값비싼 니켈과 코발트를 적게 쓰면서도, 기존 니켈 기반 양극재보다 에너지를 약 20% 많이 담을 수 있어, '더 싸고 더 오래 달리는' 배터리를 만들 재료로 꼽힌다. 다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수록 용량이 줄고 작동 전압마저 떨어졌다. 원인을 찾으려는 연구마다 배터리 내부의 최종 구조가 제각각이었고 그 변화를 결정하는 '핵심 열쇠'도 오리무중이었다.
연구팀은 배터리가 수백 번 충·방전하는 동안 양극 소재 내부를 들여다봤다. 이 소재는 원래 리튬과 금속 알갱이들이 서로 다른 층을 이루며 벽돌담처럼 가지런히 쌓여 있다. 그런데 충전을 거듭할수록 이 벽돌담을 단단히 붙잡아주던 '산소'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기둥이 하나둘 빠지자 리튬과 금속 알갱이들이 서로 넘나들며 뒤섞이기 시작했고, 결국 아무런 결국 규칙 없이 뒤엉킨 '무질서 암염 구조'로 바뀌었다. 잘 정리된 서랍이 시간이 지나며 물건들이 뒤죽박죽 섞이는 것과 비슷하다. 연구팀은 '빠져나가는 산소의 양'이 소재가 얼마나 뒤섞일지를 결정하는 방아쇠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연구팀은 배터리를 얼마나 ‘깊이’ 충전하느냐, 즉 얼마나 높은 전압까지 충전하느냐에 따라 산소가 빠져나가는 양을 조절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더 깊이 충전할수록 산소가 더 많이 빠져나갔고, 산소가 떠난 빈자리(산소 공공)가 차곡차곡 쌓이며 소재의 구조를 바꿔놓았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산소가 빠져나가는 것은 언뜻 배터리가 고장 나는 신호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재가 뒤섞이며 새로운 구조로 바뀌자, 리튬이 드나들 수 있는 길목이 오히려 늘어나 쓸 수 있는 용량이 늘어나는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실제로 산소가 빠지는 양을 정교하게 조절한 소재는 200번 넘도록 충 ·방전을 거친 뒤에도 처음 성능의 98.4%를 유지하며 놀라운 내구성을 보였다.
그동안 소재 구조가 흐트러지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할 노화 현상으로 여겼지만, 이를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설계 도구'로 보면 오히려 배터리 성능을 대폭 늘릴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홍지현 교수는 “이번 연구는 산업적으로도 배터리 구동 온도나 표면 환경을 조절하면 배터리 열화를 늦추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며 이에 이어 “산소 손실을 조절해 무질서화를 촉진하거나 억제함으로써 용도에 맞는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동 교신저자인 박규영 교수는 “정밀한 소재 분석과 계산 과학을 융합하여 20년 간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POSTECH 배터리공학과 (특성화대학원지원사업 수행 학과) 내에서의 인적 교류와 협력을 장려하는 연구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연구는 산업통상자원부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 한국산업기술진흥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 그리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다.
▶️ DOI: https://doi.org/10.1039/d6ee03906e
1. 리튬과잉층상구조소재(LMRO, Li-/Mn-rich Layered Oxides): 리튬배터리 양극 소재 중 하나로 상용화된 기존 층상구조 양극소재의 전이금속 일부가 리튬으로 치환됐다.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니켈 기반 삼원계 층상구조 소재와 달리 전이금속의 55% 이상이 망간으로 구성되어 있다.